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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흥학교/돈의학교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안중근은 항일독립운동의 기지를 마련하기 위하여 중국 산동반도, 상해를 방문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그러던 중, 상해 성당에서 르 각(Le Gac, 郭元良) 신부를 만나 나라 살릴 길을 의논하니 곽 신부는 안중근에게 첫째 교육의 발달, 둘째 사회의 확장, 셋째 민심의 단합, 넷째 실력의 양성 등의 방략을 역설했다.

국내로 돌아온 안중근은 청계동 가산을 정리하고 평안도 삼화항에 정착, 이곳에서 천주교 본당이 운영하던 돈의학교를 인수하고 뒤이어 삼흥학교를 세워 인재양성에 앞장섰다.

1907년 황해도, 평안남북도 3개도 50여 학교의 학생 5,000여 명이 참가한 연합운동회에서 안 의사가 운영하던 학교가 우승을 차지했다. 이는 두 학교가 민족정신이 투철한 인재양성을 위해 민족교육을 철저히 실시한 결과였다.

안 의사의 교육에 대한 열정은 그 이전부터 한국에서 민족의식이 투철한 민족지도자를 길러 내려면 대학 설립이 최우선 과제라 생각하고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에게 대학 설립을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날부터 안중근은 프랑스어 교육을 끊고 종교는 믿되 서양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되었다.

안응칠 역사 중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기술한 부분

「안응칠 역사」중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기술한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