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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운동

안중근은 북간도를 거쳐 한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러시아령 연해주에 도착, 의병조직에 참여하여 이범윤, 김두성 등과 의병을 양성하고 다음해 30세 되던 1908년 봄 김두성을 충독, 이범윤을 대장으로 한 대한국 의군창설에 성공한 안중근은 참모중장으로 선임되어, 독립특파대장의 이름을 띠고, 치열한 항일투쟁을 결행하기 시작하였다.

의병운동

「(왼쪽부터)안의사가 자주찾은 한인 집단거주지역 / 안의사가 국내진공작전시 넘나들던 핫산 부근의 두만강변 / 두만강변의 요충지인 회령(會寧)」

그 당시 나는 이런 논리를 밝혔다.
우리의 병력은 2~3백명밖에 안된다. 적은 강하고 우리는 약하니 적을 가벼히 여겨서는 안된다. 더구나 병법에 이르기를 ‘아무리 백번 급한 일이 있다 하여도 반드시 만전의 방책을 세운 다음 큰 일을 꾀해야 한다’고 했다.
우리들이 한번의 의거로 성공을 거둘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한 일이다.
그러나 한번에 이루지 못하면 두번, 두번에 이루지 못하면 세번, 그렇게 네번, 열번에 이르고 일백번을 꺾어도 굴함이 없이 금년에 못 이루면 내년, 내년에 못 이루면 후년, 그렇게 십년 백년이 가고, 또 만일 우리 대에서 목적을 이루지 못하면 아들 대,손자 대에 가서라도 반드시 대한국의 독립권을 회복하고야 말리라는 각오가 있어야 한다.

「안중근자서전중에서」

그 해 7월에 안중근은 의병 200여명을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함경도 경흥고을에서 일본 군경과 세차례의 교전끝에 50여명을 사살하고 그대로 일군의 주요기지인 회령으로 진격하여 일본 수비군을 격퇴하는 등 13일동안 30여차례 교전을 했는데, 안중근은 이때 잡은 포로들을 국제공법과 인도주의를 들어 석방하였으나, 의병들 중 반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결국 이 작전은 정예 일본군들의 “토벌작전”에 밀려 고군분투했으나 탄환이 떨어지고 부하들도 흩어져 중과부적으로 참패하고,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장마속 산길을 헤맨끝에 한달 반 만에야 연해주 본영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이렇듯 의병투쟁은 일본군의 반격을 받아 어려움을 겪을 때가 많았다. 그럴 때 동요하는 부하들에게 안중근은 다음과 같은 시로 격려했다.

안중근의사가 의병을 이끌때 읊던 시